얼마전에 알쓸신잡에서 종묘와 사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유시민은 거기서 대단한 통찰력을 시전했는데, 종묘와 사직의 현재적 의미를 내놓고, 그에게 있어서의 종묘는 군사독재시절 소도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 회관'을 들었다. 그리고, 사직으로는 63빌딩이나 삼성동 무역센터와 같은 마천루를 들었다.
종묘와 사직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통찰력에 혀를 내두른 동시에, 그렇다면 나의 종묘와 사직은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종묘는 주로 정신적 기둥이 되는 곳이고, 사직은 물질적 풍요와 축복을 기원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종묘, 사직은 무엇일까?
내 인생을 지탱하는 정신적 상징과 풍요의 바탕은 어디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종묘는 단언컨대 한국기독교장로회 수원교회, 돌교회 그 본당이 될 것이다. 너무나 명백하고, 확실하다. 동네 아저씨를 따라서 형과 같이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나오던, 어느덧 70년이 넘은 이 돌교회는 내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가장 외로운 시절 어디도 갈 곳이 없고, 막막할 때면 밤이든, 새벽이든, 이 곳을 찾았다. 교회마당, 예전 수돗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돌교회의 담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평안을 얻어갔다. 친한 친구와 밤을 지새며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사랑과 슬픔, 기쁨, 소망, 체념, 내려놓음, 인내, 다시 일어섬.. 모든 인생의 굴곡이 그 돌담앞에서 펼쳐졌고, 그 돌담을 통해서 응답되었다.
교회는 많이 변했다.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이제 내가 그 어린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어떤 때는 가족보다도 더 위로가 되었던 그 사람들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실망해서 떠났고, 어떤 이들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떠났고, 어떤 이들은 더 좋은 곳을 찾아서 떠났다.
그러나, 나는 떠날 수 없다. 나에게도 아픔과 실망과 상황이 없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돌담은 나의 이별을 허락치않았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떠날 수 있다. 물리적으로 주일마다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고, 내 육신의 상태가 더이상 용납하지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않다면 그 돌담에 차마 이별을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내인생의 이 유일한 종묘앞에 나는 매순간 평안을 얻는다.
물론 몇가지의 종묘를 더한다면, 언더우드상, 대학본관건물, 안암동 죠이선교회관도 나의 인생의 많은 고민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 곳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사직도 명확하다. 다름아닌 삼성전자다.
삼성전자와의 인연은 사실 약 4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픈 아버지와, 뜨개질을 하며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하던 어머니, 그리고 대학을 다니던 큰형, 그리고 동생 4명의 생계를 위해, 삼성전자 공장에 입사했다. 그러나, 누나의 총명함이 어떻게 인정을 받아 누나는 사무직으로 발령을 받게 되고, 주로 임원들을 상대하는 비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집은 적어도 8명이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는 면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삼성전자는 어린시절 내 우상이 되었다. 누나는 항상 월급날이면 그 당시 소년중앙이라는 월간만화잡지를 5살많은 둘째형과 나를 위해 사왔다. 어린 나는 한달을 그 잡지만을 기다렸다. 명절이 되면, 과자가 잔뜩 들은 종합선물세트를 가져왔다. 둘째형과 나는 그 과자를 아끼고 아껴서 오래도록 먹었다. 다음 명절때까지 과자는 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누나가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알고보니 그 날은 월급날이었는데, 누나의 가방을 불한당이 노리고 완력으로 가로채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집은 거의 한달을 굶었다. 그 다음부터 둘째형과 나는 누나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회사버스내리는 곳까지 마중나갔다. 둘째형은 초등학교 5학년 나는 7살이었다. 나는 사실 누나가 나오지말라고 했지만, 아무리 추운 날도 나는 결코 누나를 마중나가는 일을 거르지않았다.
몇년뒤 누나는 임원비서의 일이 너무 힘든지 스스로 퇴사를 했다. 그리고, 큰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우리집에는 다시 끼니를 걱정하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로부터 17년후에 내가 다시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14년간을 다니고 있다. 내가 얼마나 여기에 더 오래 몸을 담을 지 알수 없으나, 삼성전자는 아마 나의 영원한 사직이 되지않을까 싶다. 정말 어렵고, 끼니마저 걱정하던 우리 가정에 작은 풍요를 선사했던 곳이고, 또 내가 가정을 꾸리고 이제껏 등따뜻하고 배부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곳에서 힘든 시간들도 많았다. 정말 이러다 어떻게 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로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 1년에 절반이상을 해외로 돌면서 유랑자처럼 산 적도 있고, 술못먹는다고 괴롭힘당하고 왕따도 당해보고, 물론 다 오랜된 얘기긴 하지만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언젠가 자의든 타의든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 곳이 잘 되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그 마음이 변치않기를 바란다.
누나도 수원사업장에서 일했고, 나도 그 곳에서 일하고 있다. 누나는 R1(Research Center 1)에서 일했고, 나는 R3로 입사해, 지금은 R5에서 일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발전과 우리 가족사가 함께 놓여져있다. 지금은 R1과 R2가 철거되고, 그곳에는 잘 꾸며진 공원이 들어서 있다. 5월5일이면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데, 다행히 R1이 부서지기 바로 전 해에 누나를 회사로 초대했다. 누나는 자신이 수십년전 일하던 건물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었다. 어느덧 누나는 내년이 환갑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그때 경민이나 경하가 이곳에 입사해서 구경을 시켜줄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긴 글을 쓰게 됐지만, 인생에서 자신의 종묘와 사직을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흔들리지않는 기둥이 되고 감사의 징표가 되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어떤 종교와 사상을 떠나서 중요한 것이 아닌가한다.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그런 것들이 주는 의미를 되새김으로 우리가 절망가운데 낙담하더라도 새힘을 얻는게 아닌가한다.
다른 이들의 종묘와 사직도 들어보고 싶다.
언젠가 공동체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종묘와 사직.. 누군가에는 공감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안될 수도 있지만..
잊고있었던 나를 찾고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일이었던 것 같다.
날이 따뜻해지면, 아이들과 언더우드를 만나러 교정을 찾아야겠다.
- Dec. 23,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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